'동의서'에 해당하는 글 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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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턴 의사들은 본인이 할 수도 없는, 본인이 잘 모르는 내용의 동의서를 들고 다니며 많은 환자분들의 사인을 받게 된다. 사무적으로 설명을 하고 빠른 시간 안에 사인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최대한 환자를 안심시키고 신뢰감을 주고, 동시에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법을 짧은 순간 안에 모두들 배우게 된다. 하지만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곳에서, 같은 말을 하더라도 표정과 몸짓, 상황, 그리고 환자들의 다양한 반응에 설명은 30초가 되기도, 3분 이상이 걸리기도 한다.

수술을 앞둔 환자들은 다양한 반응을 보인다. 대부분은 덤덤하게 보이고 언제 수술을 받는지 물어보지만, 간혹 지켜보기 어려울 정도로 슬퍼하는 환자들과 보호자들을 만나기도 한다. 때로는 그들의 불안을 나에게 적개심으로 표현하기도 해서 부작용을 설명할 때 엄청난 공격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재미있게도 공통점은, 모두 내가 전달하는 정보보다는 수술이 대부분 안전하게 진행되고, 잘 치료를 받게 될 것이라는 확신과 위안을 필요로 한다는 점이다. 그래서인지 나는 어느 순간부터 환자분들의 표정을 살피며 '너무 걱정 말아요, 잘 될거예요'라고 말하는 것이 입에 붙어버렸다.

공감하는 표현을 하더라도 매우 바쁜 업무 속에서 그러한 표현은 단순히 빠른 업무를 위한, 영업용 멘트에 불과한 경우가 많다. 모든 사람에게 진심으로 어떠한 말을 건내기에는 우리는 너무 업무 량이 많고, 우리 개인의 시간이 매 순간 빠져나가는 삶을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끔씩 나를 그들의 삶 근처로 불러들이고 생각하게 만드는 분들이 있다.

인턴들은 환자 차트를 자세히 까보는 법이 없고 본인들에게 필요한 정보만 적어가기 때문에 그날 만났던 할아버지에 대해서 잘 기억이 나지는 않는다. 아마 70-80대의 나이가 매우 지긋하지만, 병원에 입원한 할아버지 치고 매우 정정한 할아버지였다는 점이 기억난다. 동의서 내용을 재빠르게 설명하고 자리를 떠나려던 차, 할아버지가 수술에 관해 질문해 왔다.

"수술을 하게 되면 죽만 먹거나 엄청 조금씩 먹어야 한다는데, 이제 고기는 못 먹습니까?"

보통 수술 및 처치에 관한 설명을 들으면 빠르게 '수술에 관한 것은 집도과에 물어보시는 것이 정확합니다'라고 말하고 자리를 뜨는 것이 나의 업무에는 도움이 된다. 90%는 대답 없이 그렇게 하지만, 그날은 어쩐지 할아버지의 질문과 표정이 나를 붙잡았다.

인턴은 이 환자가 수술을 받는다는 것 말고는 사실 아무것도 모른다. 그렇지만 수술 후 죽만 먹는다는 것으로 봐서 아마 위 수술을 받을 것이라는 것, 위를 절제할 것이라는 것 정도를 유추할 수 있었다.

나는 위 수술을 받는지를 재차 확인하고, 학생때 배운 수준에서 음식을 조금씩 자주 먹어야 하고, 급하게 먹으면 응급실에 올 수 있다고 설명을 하면서도, 집도과의 치료에 개입할 수는 없으므로 자세하게 설명할 수는 없다며 돌아서려 하는 찰나,

"아니 그럼 이제 수술 후에는 밥도 제대로 못 먹는단 말이오..."

이것이 정말 질문이었다면 매우 바쁜 상황에서 짜증이 났겠지만, 할아버지의 표정은 실망과 좌절이 역력했다. 이미 밥을 이전처럼 먹지 못한다는 설명도 들으셨을 테고 알고는 있지만, 현실을 부정하고 싶은 마음이 더 크셨을 것이다.

할아버지는 불평에 가까운 질문을 몇 마디 쏟아내셨고, 나는 할아버지의 나이를 흘깃 보고서,

"할아버지, 이 나이에 병원에 오는 것이 얼마나 축복인데요. 30세에 말기 암으로 오는 환자들도 많아요."

"아니 이제 평생 죽만 먹게 생겼는데 무슨 축복이오?"

"할아버지 지금껏 건강하게 사시면서 얼마나 잘 사셨어요, 일도 열심히 하셔서 결혼도 하시고 이렇게 자식들도 낳아서 잘 기르셨잖아요. 이렇게 자녀분이 훌륭하게 자라셨는데 할아버지 얼마나 잘 사셨어요"

할아버지 곁에는 할아버지 딸로 보이지만 할아버지와 같이 나이를 먹은 중년의 여성이 서계셨다. 할아버지는 문득 따님을 물끄러니 보더니, 애틋하고 또 흡족한 듯이 웃으면서 나에게 오른손을 쫙 펴서 보여주셨다.

"다섯"

"네?"

"자식이 다섯 명이야."

할아버지는 헤벌쭉, 웃어보이셨다. 나도 피식 웃으며 고개를 돌리면서,

"아이구 할아버지! 평생 죽만 먹어도 되겠네요!" 라고 장난스럽게 말했고, 다같이 웃음이 터졌다.

이제 병실을 나서려고 뒤돌아서는 순간, 할아버지는 내 등 뒤에

"고마워요, 아가씨가 최고야." 라고 말하셨다.

 

평소에는 아가씨라는 단어에 기분이 나빴겠지만, 그날만큼은 그렇지 않았다.

나는 30년도 채 살지 못한 새내기 의사, 할아버지는 산전수전 다 겪고 이제 인생의 마무리를 바라보고 있다. 연배로 치면 인생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내가, 질병과 죽음을 앞둔 할아버지에게 위로를 건네는 상황이 어떻게 보면 말이 안되기는 하다. 할아버지에게 나는 의사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죽음과는 거리가 먼 '아가씨'이기도 했기 때문이었겠지.

내가 모르는 것에 대해 이야기해야 하는 직업은, 정말 오묘하다는 생각이 드는 일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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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분홍오리
배우고 싶고 나누고 싶은 밍밍이 건강, 의학 지식과 정보를 공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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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턴이 하는 대표적인 일 중 하나는 동의서를 받는 것이다. 사실 우리가 동의서의 내용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때도 있지만 법적으로는 의사의 설명 의무...가 있기 때문에 이렇게 하는 것 같기는 하다.

학생 때는 동의서 받는 항목이 따로 실습 시험에 포함되어 있어 이것을 연습해야 했다. 정석대로 하자면 일단 첫 멘트로는 환자분 확인을 위해 개방형으로 질문하고 혼자 오셨는지 (누군가와 같이 들을것인지) 묻고 시술자와 주치의 그리고 설명자 등등을 열심히 말해야 점수를 다 딸 수 있지만 이것을 실제로 모두 시행하는 것은 정말 불가능하다.

하지만 하루에 50-80개의 동의서를 업무 외의 시간 (2-3시간) 내에 해결해야 하는 우리들에게는 동의서 하나당 많아야 3분의 시간을 할애할 수 있을 뿐이다. 사실 환자분들에 따라서 설명을 더 요하는 환자분도 있고, 아닌 환자분도 있어서 그냥 사인을 해 주시면 정말 우리로서는 감사한 일이다. 그러나 마음 한편으로는 혹시나 사고가 났을 때 내가 설명을 하지 않았다는 말을 들을까 불안한 마음이 있어 항상 가장 심각한 부작용은 꼭 설명을 해주고 있다. 물론 일어날 확률은 1/1000 이하라고 말하면서....

마취 동의서는 다른 동의서와는 달리 수술에 관한 질문들을 많이 받아서 난처한 경우가 많다. 환자들의 가장 흔한 질문은 내일 언제 수술을 받느냐는 것이다. 나도 정말 알려주고 싶지만... 수술이라는 것이 그 예정 시간에 맞추어서 칼같이 들어갈 수 없는 것이고 예정 시간에 맞추어 칼같이 끝나지 않으며 항상 변수가 있어 앞 수술이 지연되면 다음 수술도 지연 +지연 + 지연 되는 것이라 병원에서는 수술 시간을 알려주는 것을 싫어하는 듯 하다. 그치만 더욱 중요한 것은 인턴 의사들은 환자 한명한명의 병력은 커녕 수술을 언제 하는지 알아볼 시간이 없기 때문에 절대 알려줄 수 없다 ㅋㅋㅋㅋㅋ!!!!

질문을 받아서 시간이 지체되는 우리로서는 정말 저 질문이 답답할 뿐이지만... 내가 환자 입장에서 내일 수술하는 건 알겠는데 언제 내가 끌려가는지 모르면 답답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그도 그런 것이 수술을 위해서는 금식을 해야 하는데, 수술이 계속 길어질 경우 금식 기간이 길어져서 환자가 매우 불편해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저런 사정을 또 설명하면 내가 여기에 할애해야 하는 시간이 길어지기 때문에... '어머 간호사 선생님이 이따 알려주실거예요' '집도가 선생님이 수술 동의서 받으러 와서 자세히 설명해 주실텐데 그 때 물어보시면 돼요' ' 아직 확정 안 났어요' 등등의 핑계로 열심히 넘어간다.

가끔 내가 직접 마취를 하는 것도 아닌데 이 동의서를 받는 것에 대한 책임은 누구에게 지우는가를 고민하게 된다. 나는 부작용을 설명할 뿐 내가 마취를 하는 것이 아니므로 이 부작용이 실제로 발생하면 책임은 누가 지는지 궁금하다. 사고가 설명의 의무를 다 했다는 것을 보이는 것이 나의 최선일 듯 하다....상황이 어떻든저번달도 그랬지만 이번달도... 내가 있는 동안 내가 받은 동의서, 내가 한 시술 중 아무 사고가 없기를 항상 기원하며 일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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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홍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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